차영석, 대한민국 오리지널 정물화

미술비평 l 강수미

나투라 모르타(Natura Morta), 스틸 라이프(Still Life), 스틸레벤(Stilleben), 정물화(靜物畵). 이 용어들은 모두 ‘꽃이나 과일 또는 기물 따위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지칭한다. 좀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고요한 사물의 세계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난 ‘정물화’라는 한자를 제외하고, 라틴어 단어에도, 영어에도, 독일어에도 ‘삶’과 그 대극(對極)으로서의 ‘죽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서구에서 ‘정물화’는 현재 삶의 빛남, 활기참, 생기를 찬미하면서도 그 빛남과 활기와 생기가 영속하지 않을 것임을 각성시키는 그림들인 것이다.(네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죽음은 의식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감각의 죽음이다. 그러니 자연을, 삶을 고요하게 박제한 그림인 서구의 정물화 전통은 자세히 뜯어보면 끔직한 것이 된다. 가장 생동하는 감각을 영구 고요의 세계로 붙잡아 관조하기.

차영석 드로잉 시리즈<건강한 정물>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서구 정물화 전통을 따르는/극복하는 그림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가의 정물화에서 정물은, 조금 과장해서 한국 가정 90%가 ‘건강을 위해’안방이나 거실 어딘가에 모셔두고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숯 담긴 분재 또는 화초분이다. 이것들도 어쨌든 ‘고요한 사물’이자 ‘죽은 자연’이니 정물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차영석은 이 ‘대한민국 오리지널 정물’을 온통 검게 연필 칠한 바탕위에 상상을 가미해 도안 그리듯 그린다. 바탕의 검은 색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 보다 더 자극적으로 죽음을 환기시키지만 올망졸망한 상상력으로 변형된 화분과 식물들은 아귀가 안 맞아 우습거나 귀엽다. 이렇게 차영석은 한편으로 과도하게 곧이곧대로 서구 ‘정물화’를 해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지불식간에 한국식 소재의 정물화로 그 서구 정물화를 극복한다.

우리가 흔희 떠올리는 정물화는 자연물, 인공물가릴 것 없이 다종 다기한 사물을 재현한다. 다종 다기함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는 정물화를 보면서 오로지 시각만을 사용한다. 정물화가 관조의 대상인 한 감상자의 다른 감각은 억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로크 화가 헤다(W. C. Heda)가 그린 정물화에서 침샘을 자극하는 레몬과 찔릴 듯 날카롭게 깨진 유리잔을 다만 볼 뿐이다. 보면서 신맛과 통증을 상상할 뿐이다. 그런데 차영석의<건강한 정물>을 보면서 우리는 좀 더 다양한 감각을 즐길 수 있다. 물론 대가들의 재현능력에 비하면 차영석의 묘사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그의 그림에서 도한 우리가 화초를 만지거나 숯의 기운을 흡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건강한 정물>에서 시각 말고 즐길 수 있는 다른 감각이란 엉뚱하게 에로틱하거나 뚱한 표정으로 변형된 화초들이 발생시키는 웃음이고, 엉성한 말놀이가 빚어내는 싱거운 유머이다. 이를테면 ‘건강을 위한 숯’은 ‘건강한 정물’이고, 그릴 때 ‘건강한 정물’은 ‘Still Life'의 번역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