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설

주은정

난초 화분, 도자기, 러시아 인형, 곤충, 새. 여러 사물들이 화면 위에 늘어서 있다. 작가 차영석의 화면에서는 눈에 꽤나 익은 풍경이다. 건강을 위해서나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으는 다양한 수집품들을 채집하여 그린 그의 연작 ‘건강한 정물’에서 이미 이 사물들의 풍경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습관적 세계>전에서 보여주는 그의 신작들-‘습관적 세계’와 ‘건강한 정물’-에서도 이 사물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이전의 ‘건강한 정물’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같아 보인다. ‘건강한 정물’과 ‘습관적 세계’를 가르는 그 미세한 차이는 무엇일까?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가설 하나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습관적 세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는 색의 도입이다. ‘건강한 정물’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흑백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습관적 세계’는 그 흑백 톤에 금색을 과감히 받아들인다. 금색의 도입으로 화면은 불가피하게 얼마간의 장식성뿐만 아니라 관능성마저 띤다. 특히 까만 구슬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의 경우 금색과의 대조를 통해 이러한 특성이 한층 더 두드러진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 화면구성상의 변화의 조짐을 들 수 있는데, 이 점을 보다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건강한 정물’은 타인의 수집품들을 채집하고 나열하기에 숨가빴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관한 사물들이 한데 모여 있어 생기는 어색함과 기묘함,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는 우스꽝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각 사물들을 서로 연결 짓고자 하는 의도는 거의 전무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물들이 서로 무관하게 한 자리에 흩뿌려진 광경의 기이함에 강조점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작에서는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고려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암시하는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의 채집 및 나열의 강박적인 열의가 이전에 비해 누그러지면서 집적의 정도가 한결 여유로워지고 화면은 보다 많은 여백을 받아들인다. 고립된 개별 사물들 사이의 빈 공간이 단절을 의미했던 ‘건강한 정물’과는 달리, ‘습관적 세계’에서 이 공백은 화면 전체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완급을 조절한다. 또한 러시아 인형의 크기를 저마다 달리하여 구성의 강약을 꾀하는가 하면, 작은 식물과 실에 꿰어진 구슬, 늘어지고 엉킨 실, 늘어선 성냥개비들이 사물과 사물 사이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연결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나열보다는 전체화면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각 사물을 안배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구성의 이 같은 변화는 ‘건강한 정물’과는 달리, 사물들이 함께 빚어내는 전체적인 ‘세계’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나 전체를 강조한다는 것이 일관된 내러티브로 묶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서술구조는 ‘건강한 정물’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 따라서 ‘습관적 세계’는 ‘건강한 정물’에 비하면 조화롭지만, 전체를 일괄하는 내러티브가 있는 작품에 비하면 조화롭지 않다. ‘습관적 세계’를 이렇듯 모호하게 아우르고 있는 구성 원리는 대체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작가가 지닌 취향의 ‘습관’이다. ‘건강한 정물’이라는 재료를 재가공한 ‘습관적 세계’는 특정한 의미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그림이 아닌 바로 그 만큼 작가 자신의 취향에 솔직하게 기댄다. 작가는 각 사물을 모티프로 삼아 화면 위에 하나하나 배치하며 그려나가면서 화면 전체를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마치 천을 짜듯 직조한다. 그리고 도자기와 러시아 인형, 작품 곳곳에 배치된 원형 모티프에 이르기까지 그는 화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물들을 패턴으로 채운다. 그 때 짧은 선을 무수히 반복하여 그리는 세밀하고 정교한 손놀림이 거의 모든 사물의 표피 위에 예외 없이 펼쳐진다. 결국 ‘습관적 세계’를 그리면 그릴수록 ‘건강한 정물’이 노출하는 사물에 대한 특정 개인의 취향이나 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나 시대의 취향이 지워지고 패턴화와 미세함을 향한 작가 자신의 취향의 습관 또는 습관적인 취향만이 오롯이 남는다. 그 ‘습관적 세계’ 안에서 그는 사물의 옷을 입은 자신의 취향과 습관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아직은 하나의 가설일 따름이다. ‘습관적 세계’를 이제 겨우 한 번 그것도 살짝 엿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가설의 운명은 앞으로 ‘습관적 세계’가 어떻게 쌓이고 펼쳐질지에 달려있다. 이 가정이 참으로 증명된다면 뿌듯하겠지만, 한편으로 ‘습관적 세계’가 이 가정으로부터 보기 좋게 빠져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 또한 적지 않다. 좀 더 두고 볼 일이다.